신임사화(경종) 

삼수의 변이라고도 하며 

'병신처분'으로 권력을 장악한 노론은 숙종 과 결탁하여, 남인의 지지를 받던 장희빈이 낳은 세자(경종)을 폐출하고 연잉군, 즉 훗날의 영조를 세자로 세우려 하였다. 이를 위해 노론은 세자에게 대리청정을 맡기도록 숙종에게 청하고(이이명의 정유독대), 비슷한 생각이었던 숙종도 응한다. 하지만 그들의 의도와는 다르게 경종의 대리청정은 그를 쫓아내게 할 만큼의 흠집이 발견되지 않았고, 노론에게는 설상가상으로 숙종이 급격히 병약해져 원래의 계획을 실행할 틈도 없이 60세를 일기로 승하한다. 이에 경종이 조선의 20대 국왕으로 즉위하게 되나, 여전히 노론은 그에게 호의적이지 않았다. 경종을 옹립했던 남인은 박살났으며, 지지세력인 소론은 '병신처분'으로 이미 실각한 상태였다. 

 이렇게 허수아비로 살면서 노론을 칠 날만 기다린다.(왕권 강화를 기약할 날) 

그러다

이때까지 보여준 모습과 다르게 명확하고 또렷하게

결탁이니 교통이니 따위의 말은 심히 무엄하다. 다시는 번거롭게 하지 말라!("締結交通等語, 殊甚無嚴。 更勿煩瀆。")"[ 는 말로 반격을 준비한다.

 그후 김일경이 상소를 올리고, 이에 경종은

 김일경의 상소에 "구언에 응하여 진언(盡言)[17]한 것을 깊이 가납(嘉納)[18]한다"라고 말하며 그대로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환국을 진행한다.

그리고 노론 반격의 일격인 신임사화를 단행한다.


“성상(聖上=임금이나 황제)을 시해하려고 모의하는 역적(逆賊=나라나 임금에게 반역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혹 칼로써, 혹 독약으로, 또 폐출(廢黜=작위나 관직을 떼고 내침)을 모의한다고 하는데, 나라가 생긴 이래 없었던 역적들이니 급하게 토벌해서 종사를 안정시키소서… 신은 비록 신분은 미천하지만 왕실을 보존하려는 뜻을 가지고 흉적이 종사를 위태롭게 하려는 모의를 직접 보고는 호랑이 입에 먹이를 주어서 은밀히 비밀을 알아낸 후 감히 이처럼 상변(上變=행위를 고발함)하는 것입니다.”

―『경종실록』 2년 3월 27일, 목호룡의 고변


1722년(임인년), 지관이었던 목호룡(睦虎龍)이 노론의 어린 자제들이 경종을 살해하고 이이명[19]을 옹립하려 한다라고 고변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칼·독약·폐출(반정)의 3가지 방법을 썼다는 점에서 삼수의 옥, 혹은 삼급수(三急手)라고 한다. 

이러이러해서 노론을 치는 데 성공하여 세력이 많이 줄어듦.

경종의 죽음은 독살에 의한 암살로 추정된다.

+ 신임사화 찾다가 발견한 이중환 이야기

이중환은 목호룡의 고변사건이 무고임이 밝혀짐에 따라 이와 관련된 자들을 색출하다 등장하게 된다.  

목호룡이 “(이중환이) 저를 충의로써 격려하였음은 물론, 깊은 계교로써 저를 일깨워 주었습니다”라고 한 진술이 실려 있었다고 한다. - 목호룡이 죄지어서 연루됨

 결국 이중환은 금부()에 체포되었고 여러 차례 심문을 받았다. 이듬해 8월 경종이 의문사하고 세제인 연잉군이 그 뒤를 이어 임금에 오르게 되는데, 곧 영조이다. 경종 대에 여러 번 시련을 겪은 영조는 목호룡 고변사건을 조사하기 위해 그를 불러다 친히 국문하기에 이르렀는데, 이때 이중환도 처남인 목천임과 함께 다시 조사를 받았다. 

삼사()에서는 관련자 모두를 극형에 처하기를 거듭 주장하였으나 영조는 “증거가 없는데 사형을 시켜서는 안 된다”라고 하면서 다시 고문을 명하였다. 이중환은 다시 여섯 차례의 고문을 받았지만 모든 혐의를 부인하였다. 십여 차례의 모진 고문을 견디고도 끝내 자신의 혐의를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영조는 그를 외딴섬에 유배 보내는 것으로 마무리할 수밖에 없었다.



<참고>
위키나무

[네이버 지식백과] 이중환이 연루된 신임사화 (신정일의 새로 쓰는 택리지 1 : 살고 싶은 곳, 2012. 10. 5., 다음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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