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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효에 대해(wikiwand 참조)- 위의 사건 이해

(3차 갑오개혁) 일본의 후원과 압력으로 귀국한 그는 김홍집의 친일 내각(제2차 김홍집 내각)에 내부대신으로 입각하여 개혁을 시도했으나, 점진적인 개혁을 펼치려던 김홍집과 심한 갈등을 계속하다가 김홍집을 실각시킨 뒤 자신이 총리대신서리가 되었다. 곧이어 개각에서 실권을 장악한 뒤 약 200여 일 동안 2차 갑오개혁을 단행했다. 그는 행정·군사·교육 면에의 개혁을 추진하기 위하여 조선의 자주성을 강조하고, 일본식보다도 오히려 구미식 행정의 채택을 주장했다. 이무렵 삼국간섭으로 일본세력이 퇴조하자 조선정부는 친러시아 정책을 폈다.

1895년(고종 32년) 7월 초 박영효는 명성황후를 암살할 계획을 세운다. 개화 이후로 고종은 밖으로는 일본의 견제를 받고 안으로는 군국기무처가 마음대로 하여 고종은 한 가지 일도 단독으로 결정할 수 없었다. 명성황후는 이를 분하게 여겨 점차로 군권(軍權)을 회복하기를 계획하여 러시아와 결탁하니, 박영효는 이를 우려하였다.명성황후는 군국기무처의 일부 급진개화파가 독단하는 것을 두려워하였고 이들의 정책을 뒤엎을 기회를 찾았다. 이때 박영효는 단독으로 계략을 세워 왕비 암살을 계획하였다.

한편 명성황후는 1894년 여름부터 급진개화파를 사살할 계획을 세운다. 유길준은 명성황후를 "세계에서 가장 나쁜 여성"이라고 혹평하였으며 미국인 은사 모스에게 보내는 편지에 명성황후의 개화당 살해 계획을 폭로하였다. 편지 본문에서 유길준은 민비가 도움을 청하기 위해 러시아 공사와 비밀 접촉하고, 1894년 가을 개화당 모두를 살해하려는 계획을 꾸미다가 대원군에게 발각되었다고 밝혔다. 왕비의 급진개화파 살해 기도를 접한 개화파는 개혁정책 외에도 자신의 신변을 걱정하게 되었다.

박영효는 왕후의 권모와 계략을 두려워 하여 암살을 감행하지 않으면 화근을 근절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1895년 7월 마침내 날짜를 잡아 계책을 정하고 일본에 병력 을 요청하였다. 그는 유길준이 자기와 친근하다고 여겨 가만히 뜻을 알렸다. 그런데 유길준은 바로 박영효의 왕비암살 계획을 임금에게 밀고했다 -> 이때부터 맛이 간듯, 일본으로 도망.

1895년(고종 32년) 7월 말 도쿄에 도착한 박영효는 후쿠자와 유키치와 이노우에 가오루 등의 주선으로 일본 도쿄 구석의 판자촌에 은거하였다. 이노우에와 후쿠자와는 특별히 경호원을 보내 박영효를 지켜주었다. 한편 조선에서는 계속 자객을 파견하였고 그는 외부 출입을 삼가하였다.

1895년 10월 을미사변 소식을 접하였다. 그러나 그는 곧 을미사변에 가담한 조선인 협력자의 하나로 지목되었다. 을미사변에 그가 직접 가담한 혐의가 보이지 않자 1898년 12월 16일 중추원 회의에서 박영효를 불러들여 정부요직에 등용하자는 건의가 나왔다. 그러나 고종은 이를 거절했다. 도리어 박영효의 정계복귀를 꾀했다는 이유로 고종과 척족 대신들은 독립협회를 강제 해산시켰다.  1900년(광무 7년) 독립협회의 해산 이후 그는 무력으로 정부를 전복해야 된다고 결심하여 무력 쿠테타를 계획한다. 윤치호서재필 등과 수시로 서신을 주고받던 그는 이들과의 연락과 사람을 국내에 들여보내 국내외의 정세에 대한 정보와 자료들을 입수한다.


춘생문 사건


시대적 배경

1894년동학농민운동이 촉발한 청일전쟁은 일본의 승리로 막을 내렸다. 일본은 시모노세키 조약을 통해 대만 및 요동반도의 할양을 얻어냈다. 그러나 일본의 요동반도 할양에 러시아가 반발했고 독일과 프랑스를 끌어들여 요동반도 할양을 무위로 돌린다.(삼국간섭)

이 사건은 고종과 명성황후에게 러시아의 위력을 실감하게 한 계기가 되었고 일본을 견제하기 위해 러시아쪽으로 기우는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명성황후의 측근들인 민씨 척족들도 러시아와 친밀한 상황이었다.

일본은 김홍집, 박영효 등을 앞세워 갑오개혁으로 조선 식민지화를 추진하다가 고종과 명성황후의 러시아와의 연대에 불안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결국 김홍집 내각이 실각하고 박영효가 명성황후 암살 모의로 수배되는 등의 사태에 일본은 극단적인 사태 인 을미사변을 일으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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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임사화(경종) 

삼수의 변이라고도 하며 

'병신처분'으로 권력을 장악한 노론은 숙종 과 결탁하여, 남인의 지지를 받던 장희빈이 낳은 세자(경종)을 폐출하고 연잉군, 즉 훗날의 영조를 세자로 세우려 하였다. 이를 위해 노론은 세자에게 대리청정을 맡기도록 숙종에게 청하고(이이명의 정유독대), 비슷한 생각이었던 숙종도 응한다. 하지만 그들의 의도와는 다르게 경종의 대리청정은 그를 쫓아내게 할 만큼의 흠집이 발견되지 않았고, 노론에게는 설상가상으로 숙종이 급격히 병약해져 원래의 계획을 실행할 틈도 없이 60세를 일기로 승하한다. 이에 경종이 조선의 20대 국왕으로 즉위하게 되나, 여전히 노론은 그에게 호의적이지 않았다. 경종을 옹립했던 남인은 박살났으며, 지지세력인 소론은 '병신처분'으로 이미 실각한 상태였다. 

 이렇게 허수아비로 살면서 노론을 칠 날만 기다린다.(왕권 강화를 기약할 날) 

그러다

이때까지 보여준 모습과 다르게 명확하고 또렷하게

결탁이니 교통이니 따위의 말은 심히 무엄하다. 다시는 번거롭게 하지 말라!("締結交通等語, 殊甚無嚴。 更勿煩瀆。")"[ 는 말로 반격을 준비한다.

 그후 김일경이 상소를 올리고, 이에 경종은

 김일경의 상소에 "구언에 응하여 진언(盡言)[17]한 것을 깊이 가납(嘉納)[18]한다"라고 말하며 그대로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환국을 진행한다.

그리고 노론 반격의 일격인 신임사화를 단행한다.


“성상(聖上=임금이나 황제)을 시해하려고 모의하는 역적(逆賊=나라나 임금에게 반역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혹 칼로써, 혹 독약으로, 또 폐출(廢黜=작위나 관직을 떼고 내침)을 모의한다고 하는데, 나라가 생긴 이래 없었던 역적들이니 급하게 토벌해서 종사를 안정시키소서… 신은 비록 신분은 미천하지만 왕실을 보존하려는 뜻을 가지고 흉적이 종사를 위태롭게 하려는 모의를 직접 보고는 호랑이 입에 먹이를 주어서 은밀히 비밀을 알아낸 후 감히 이처럼 상변(上變=행위를 고발함)하는 것입니다.”

―『경종실록』 2년 3월 27일, 목호룡의 고변


1722년(임인년), 지관이었던 목호룡(睦虎龍)이 노론의 어린 자제들이 경종을 살해하고 이이명[19]을 옹립하려 한다라고 고변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칼·독약·폐출(반정)의 3가지 방법을 썼다는 점에서 삼수의 옥, 혹은 삼급수(三急手)라고 한다. 

이러이러해서 노론을 치는 데 성공하여 세력이 많이 줄어듦.

경종의 죽음은 독살에 의한 암살로 추정된다.

+ 신임사화 찾다가 발견한 이중환 이야기

이중환은 목호룡의 고변사건이 무고임이 밝혀짐에 따라 이와 관련된 자들을 색출하다 등장하게 된다.  

목호룡이 “(이중환이) 저를 충의로써 격려하였음은 물론, 깊은 계교로써 저를 일깨워 주었습니다”라고 한 진술이 실려 있었다고 한다. - 목호룡이 죄지어서 연루됨

 결국 이중환은 금부()에 체포되었고 여러 차례 심문을 받았다. 이듬해 8월 경종이 의문사하고 세제인 연잉군이 그 뒤를 이어 임금에 오르게 되는데, 곧 영조이다. 경종 대에 여러 번 시련을 겪은 영조는 목호룡 고변사건을 조사하기 위해 그를 불러다 친히 국문하기에 이르렀는데, 이때 이중환도 처남인 목천임과 함께 다시 조사를 받았다. 

삼사()에서는 관련자 모두를 극형에 처하기를 거듭 주장하였으나 영조는 “증거가 없는데 사형을 시켜서는 안 된다”라고 하면서 다시 고문을 명하였다. 이중환은 다시 여섯 차례의 고문을 받았지만 모든 혐의를 부인하였다. 십여 차례의 모진 고문을 견디고도 끝내 자신의 혐의를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영조는 그를 외딴섬에 유배 보내는 것으로 마무리할 수밖에 없었다.



<참고>
위키나무

[네이버 지식백과] 이중환이 연루된 신임사화 (신정일의 새로 쓰는 택리지 1 : 살고 싶은 곳, 2012. 10. 5., 다음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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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반부터 꼭 연도를 다 외울 필요는 없다

큰 사건 위주로 외운 다음 나머지 이야기 식으로 순서만 알아도 된다

그러나

여유가 있으면 다 외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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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 풀다 헷갈리는 것

단순 나열식 정리

전체적으로 공부 왠만큼 되고 평균 80-90정도 나올 때 보는 용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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